글(+썰)

괴로운 오타쿠가 말하는 이상의 <날개>

시라데유 2023. 3. 16. 14:19


부제 : 이 글을 바칠테니 이제 그만 내 머릿속에서 나가시오

서문


게임 캐릭터 모티브 알아가려다 원작에 중독된 오타쿠를 아십니까? 저는 전혀 유쾌하지 않습니다. 이 지독한 문학에 대한 상념에 두통이 일어 정신이 혼탁합니다. 이제 그만 이 괴로움에서 해방되고 싶습니다. 한번 언어의 형태로 이를 풀어낸다면 조금이나마 편해지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담아 이 글을 씁니다.

사실은 쓰고 싶지 않습니다. 제게는 그다지 글을 쓰는 재주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거니와, 사람들은 다들 학생때 이상문학을 배웠다 하는데 저는 전혀 그런 기억이 없습니다. 이상이라는 작가에 대해서도 잘 모릅니다. 아는 것은 이제와 읽은 글 몇 편뿐입니다.

사람이란 본질적으로 타인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자신이라는 거울에 비추어 보고 자신의 시야에서 해석할뿐입니다. 거울에 비친 상의 뒷면이 정말 자신이 상상한 대로의 모습일지는 알 수 없는데도 말입니다. 하여 제가 할 수 있는 일 역시 그와 같습니다. 이걸 읽을 이름 모를 당신에게, 오직 스스로의 짧은 식견과 어리숙한 사고방식만으로 이루어진 거울에 비친 날개를 설명하는 것 말입니다.

말해두는데 저는 당신을 설득하려고 이 글을 쓰는 게 아닙니다. 단순하게 제가 괴로운 이유를 열거해서 고통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의 작품을 다 읽고나면 보려고 그의 평전을 샀습니다. 아무리 문학에 정답은 없다지만, 아마 그를 알게 되고, 타인이 더 넓은 시야에서 바라본 날개를 알게 되면 지금 쓰는 이 글이 부끄러워 제정신으로는 버틸 수 없을 것이 눈에 선합니다.

그럼에도 제게는 당장의 괴로움을 해소하는 것이 급합니다. 부디 이 글을 비웃어도 좋으니 가여이 여겨 미워하지는 말아주시기를.



위트와 패러독스와...


처음부터 결론을 말하겠습니다. 이것이 내가 괴로워하는 이유입니다. 그가 종이 위에 풀어낸 위트와 패러독스 말입니다. 나는 글을 쫒아가다 그가 풀어 놓은 패러독스에 홀리고 맙니다.

쉽게 설명하기 위해 유명한 사고 실험을 이곳에 빌려 오겠습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아십니까? 예의 그 상자 속의 고양이가 절반의 확률로 죽을 수도 죽지 않을 수도 있는데, 이를 상자를 열어 확인하기 전까지는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그 둘이 중첩된 상태라는 사고 실험 말입니다.

현실이라면야 확인하든지, 확인하지 않든지, 우리가 모를 뿐 고양이의 생사는 이미 결정된 사항이겠습니다만, 사고 속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고 속의 고양이는 우리가 그것이 죽었다 살았다 결론 짓기 전까지는 어느 쪽도 맞고 어느 쪽도 틀린 그야말로 삶과 죽음이 중첩된 상태라는 것입니다.

이 논리를 그대로 지면으로 옮기겠습니다. 다른 것은 하나 뿐입니다. 고양이의 생사를 결정지을지 고양이에게 삶과 죽음을 중첩시킨채 놓아 둘지를 정하는 결정권이 우리가 아니라 작가에게 있다는 것 말입니다.

물론 작가라고 한들 우리가 지면에 적힌 고양이를 우리의 사고속으로 끌고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고양이는 우리가 끌고 들어온 지면 속 고양이의 위조일 뿐입니다. 지면 속 고양이는 여전히 작가의 손아귀에 있다는 걸 어떻게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날개에도 삶과 죽음이 중첩된 고양이가 있습니다. 저는 날개에서 무언가의 결론을 가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삶과 죽음이 중첩되어 있는 모순적인 고양이를 가지고 어떻게 제대로된 논리를 만들어 낼수 있겠습니까?

슬프게도 저는 위조품조차 제대로 만들지 못했습니다. 고양이에게 삶과 죽음중 무엇을 줘야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내가 괴로운 이유입니다. 동의하겠습니다. 가증할 상식의 병입니다.



은화


저는 날개를 생각할 때마다 광인처럼 은화를 몇번이고 중얼거리고는 합니다. 당연히 알고 있겠지만 그래도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은화라는 건 화폐입니다. 화폐는 즉, 돈입니다.

돈이라는 건 그 자체로는 별로 필요가 없습니다. 돈이 가치를 가지는 건 그것으로 무엇을 얻을 수 있을 때 입니다. 우리야 돈으로 무언가를 얻을 수 있는 환경에서 살고 있으니 곧잘 돈 그 자체에 가치가 있는 것으로 착각하기 쉽습니다만 요컨데 무인도 같은 곳에 툭 떨어지면 그 때는 돈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날개에서 돈은 내객에게 아내에게, 아내에서 화자에게 흐릅니다. 내객들은 아내와 있기 위해-이걸 어떤 적나라한 단어로 표현할 수는 있겠으나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기실 정말로 그런 짓을 하고 있었다면 옆방에 있던 화자가 모를 수야 있겠습니까- 은화를 놓고 갑니다. 그럼 아내는 어째서 화자에게 은화를 건넨단 말입니까?

가정을 해봅시다. 어쩌면 아내는 내객들과 비슷한 이유로 은화를 건넨걸 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화자와 같이 있기 위해서요. 당신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이미 같은 집에 살면서 아내가 화자를 먹여살리지 않느냐고. 맞습니다. 그렇지만 또 의문합니다. 화자와 아내는 정말 함께 있습니까?

첫째로 이 부부 사이에는 서로 이야기가 없습니다. 방도 따로 씁니다. 화자는 자기 방에 가만히 있다가 아내가 나가고 나서야 아내의 방에 들어옵니다. 그리고는 아내가 오기 전에 다시 자기방으로 돌아갑니다. 밥도 따로 먹습니다. 좀처럼 함께 있는 법이 없습니다. 이것을 진정 함께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까?

둘째로 화자는 자신의 방. 그 감금적이다 싶은 공간에 안주한채 말라가고 있을 뿐입니다. 화자의 방은 세속적인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심지어 행복이나 불행이나 하는 가치판단도 하지 않으려 합니다. 머릿속에서 혼자만의 연구를 해도 곧 잊어버리고 맙니다. 인간사회가 스스럽습니다.

사람은 생각하고 말하고 사회를 이루어 사는 동물입니다. 그렇다면 추상적으로 또 극단적으로 말해 화자는 인간이길 거부하고 있습니다.

아내가 있는 세속에 화자는 속하지 않습니다. 서로 같은 세상에 있질 않은데 이것을 진정 함께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까?

만일 아내가 화자와 함께 있기 위한 대가로 은화를 주는 것이라 한다면, 그렇다면 다시 생각해 봅시다. 아내가 바란 함께 한다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지금까지처럼 화자는 방에 있고 그에게 모이를 주며 보살피는 생활? 그래서 그에게 은화를 주면서 바깥세상에 관심이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고 내심 안심 했던 걸까요? 아니면 그가  그 돈으로 뭔갈하길 바랬을 까요? 방에서 나와 세상으로 나오도록? 아니면 그저 화자의 방을 저금통 대신 쓴 것이었을까? 동전을 올리면 안에서 장난감이 튀어나와 쏙 집어가는 장난감처럼 아내도 특이한 저금통을 가진 것이었던 걸까요? 아니면 자신이 내객에게 은화를 받으며 느낀 감정과 비슷한 걸 화자에게도 느끼게 하고 싶었던 걸까요? 아니면… 아니면… 아내가 화자에게 은화를 건넴 으로써 얻은 쾌감이란 대관절 어떤 종류냐는 말입니다.

아내가 건넨 은화의 의미는 삶과 죽음이 중첩된 고양이와 같습니다. 확정되지 않았으니 어느 것도 맞고 어느 것도 틀리지요. 이러니 제가 어떻게 광인처럼 은화라는 말을 중얼거리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정답이 없는 질문에 골몰해 이것이 맞을지 저것이 맞을지를 따지며 끝에가선 항상 흐지부지 덮어두고는 별안간 다시 똑같은 짓을 반복하는 어리석음에서 저는 대체 언제쯤 벗어날 수 있단 말입니까.

은화의 의미는 영영 진실을 알 수 없어도 아내가 준 은화가 어떤 일을 했는지는 그보다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은화는 세속의 가치입니다. 세속을 거부하는 화자는 은화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돈을 사용한 교환은 서로가 돈의 가치를 인정할 때에야 발생합니다. 한쪽이 그 가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교환이 성립할 수 없습니다. 아내도 화자에게 돈이 필요없다는 것 쯤은 압니다. 아내가 무엇을 원하고 은화를 건네었든지 화자는 교환에 응하지 않을겁니다. 그래도 아내는 화자에게 계속 은화를 줍니다. 비세속적인 화자의 방에 세속의 가치인 돈이 점차 쌓여 갑니다. 화자가 이를 내다버려도 은화는 계속 쌓입니다.

화자에게 돈은 의미가 없습니다. 하지만 화자에게 아내는 의미가 있습니다. 유일하게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 화자는 은화를 무시하려해도 아내가 은화를 건넨다는 행위는 무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내의 행위를 쫓다 보면 은화 역시 무시할 수 없습니다.
아내가 은화를 건넨 쌓이고 쌓인 은화는 결국 그리 무기력하고 비세속적이려 하던 비인간인 화자에게서 세속에 대한 호기심을 교환해냅니다. 아내는 은화를 건네며 화자더러 인간이 되라고 종용하고 있던 것과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무슨 이리도 지독한 연애가 다 있답니까.

화자는 세속의 가치를 손에 쥐고 자신의 세계 바깥으로 외출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동안 하던 일이 있는데 어떻게 한 번에 바뀔 수 있겠습니까. 화자는 수단을 들고서도 쓰지 못하고 그저 거리를 거닐다 돌아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불행이니 행복이니 생각하길 거부하고 있었는데 원하는 것이 있겠습니까. 원하는 것이 없는데 돈을 어디 써야할지 알겠습니까. 그래놓고는 집에 돌아와 그걸 아내에게 건냅니다. 밖에 나갈 수단을 다시 그걸 쥐여준 아내에게 돌려주다니…

무슨 이리도 지독한 연애가 다 있답니까.

화자의 모이를 화자의 방에 가져다 둔 걸로 보아 아내의 입장에선 영문을 알 수 없으니 화자가 지쳐 잠들었겠구나 싶어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화자에게는 일종의 교환이 일어난 셈이었습니다. 의도한 바는 아니나 자신에게 주어진 수단으로 아내와 같이 있을 수 있다는 걸 깨달아 버린 겁니다.

화자가 세속을 거부한 비인간일 수 있도록 보살펴준 것도 아내고, 그가 다시 인간이 되도록 계기와 수단을 제공한 것도 아내고, 마침내 화자가 다시 소망이라는 인간성을 얻게 되는 것도 아내 때문이라니. 정말… 어떻게… 이리도 지독할 수가…

아내는 아직 화자의 변화를 모르니 이제까지 처럼 화자에게 돈을 주고갑니다. 화자는 지난 밤 배운 대로 그 수단으로 아내와 함께 자는 경험을 교환합니다. 두 번이나 있으면 아내도 이제 화자가 뭘하고 싶어하는지 압니다. 고작 깨달은 인간성이라는게 아내랑 같이 자는 거라니. 몇번이나 반복한 말이지만 다시 한번. 무슨 이리도 지독한 연애가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부부간의 교류라는 것이 사이에 과연 돈이 끼어들어야 성립하는 것이 덥니까. 아내는 늘 그랬듯이 대가없이 화자를 자신의 방으로 데려오는 것으로 화자에게 먼저 손을 내밉니다. 하지만 화자는 불안해합니다. 불과 하루 이틀전에 배운 논리와는 다르니까요. 하지만 소망은 더 확고하고 그걸 이루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한 것 같은데, 돈이 없어서 울고맙니다. 아내는 화자의 착각을 넌지시 정정해주면서도 화자가 수단이 목적이 아니라는 걸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다시금 화자가 생각하는 수단을 쥐어줍니다. 아내는 이번에도 화자를 기다려줄 요량이었던 모양입니다.


숙명적으로 발이 맞지 않는


그러나 그게 생각대로 이루어졌다면 이 소설이 은화나 아내지 날개겠습니까. 만일 당신이 제가 이 문장을 육성으로 뱉는 걸 들었더라면 이 억울하고 허망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을 텐데. 바로 직전에 수단은 목적이 아니란 이야길 했는데도 불구하고 저는 그걸 받아들이기가 힘듭니다. 이렇게까지 지독히도 순수한 연애담을 썼으면서도 그 연애담이 이 소설의 수단에 불과하다니. 화자도 울었는데 저도 좀 울면 어떻습니까. 아주 오열하고 싶습니다.

이 소설의 제목이 날개이고 목적이 다시금 날자구나 하는 것이기에 이 연애는 수단일 수 밖에 없습니다. 아내는 화자를 보살피고 이끌어주는 존재이긴 합니다만, 그건 이제껏 화자가 생각하길 거부하고 속세에 끼기를 거부하고 순간의 즐거움이나 잠깐 즐기고 마는 대등한 인간이기보다 동물에 가까운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화자가 아내가 벼락치듯이 화낼거라 예상해도 화내지 않은 건 그 때문일 겁니다. 누가 말 안통하는 동물한테 화를 낸단 말입니까… 이제야 조금 회복한 인간성이란 것도 고작 아내에 대한 것 뿐입니다. 아시겠지만, 인간이란 보통 이래서는 안됩니다. 이래서는 안되는 겁니다…그리고 화자가 이런 상태로 생존할 수 있던 것은 아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진작에 싸우고 다투고, 그리고 화해했어야만 했습니다. 의존하고 받아주기만 하는 그저 안온한 형태로는 안 되었던 겁니다. 제 서글픔이 느껴지십니까?

이렇게 고착된 상태를 깨부수는 불의의 재난이 필요했던 겁니다. 그래서 화자는 병에 걸려옵니다. 공교롭게도 이 날은 화자가 드디어 아내가 준 수단을 밖에서 사용해본 날이기도 했습니다. 과장하자면 화자가 아내가 아닌 타인과 상호작용했다는 의미입니다. 겨우 한발짝 더 내딛었거늘 바깥은 아내가 안심하고 화자를 활보하게 둘 수 없는 위험이 있는 곳이라 증명되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아내는 화자를 다시 방에 넣어두려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더 있었습니다. 상황이 변한 건 화자뿐 만이 아닙니다. 화자가 처음 외출한 날부터 아내에게는 비밀이 생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객들이 더 이상 가만히 이야기나 하다 가는게 아닌겁니다…

아내가 아달린을 먹인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화자가 아스피린이라 추측했을뿐 아내는 먹고 자라고만 했으니 속이고 먹이려 한 건지도 우린 모릅니다. 다만 제 생각에 죽이려한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정말 죽이려 했다면야 왜 정량만 먹이고 말았겠습니까.

다시 가정해봅니다. 아내는 들키고 싶지 않았던 것 뿐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내객들에게 남편을 들키고 싶지 않았던 걸까요? 개인적으론 남편의 존재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지 않은가 싶습니다. 아니고서야 남편이 집에 있을땐 그냥 이야기만 하다갈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럼 남편에게 내객들과의 일을 들키고 싶지 않았던 걸까요? 남편을 실망시켜서 관계가 틀어지고 싶지 않아서???

어찌되었건 아내는 이제 화자를 더 이상 이끌어주지 않습니다. 대신 방에 가두어둡니다. 그래도 화자는 불만이 없습니다. 그러나 언뜻 비슷해보여도, 그럼에도 이미 변한 것들이 있기에. 되살아난 인간성이 있기에.

화자가 발견한 아달린이 아니었어도 일어났을 일인 겁니다. 어쩌면 아달린을 보지 못했어도 약효가 잘 들지 않는 날이 있어 화자가 중간에 깨어나 아내가 하는 일을 보게 되었을 수도 있지요. 그렇게 충격받은 화자가 의심하고 생각하고 고뇌하며 급격히 회복한 인간성을 부정하기 위해 다시 집에 돌아가고, 아내도 이제는 동물이 아닌 화자에게 화를 내고, 자신을 돌봐주던 아내에게 돌아가야할지를 고심하다 스스로의 날개로 다시 날아보자 하는 자아성장은 정말 눈부시게 감동 적이고 전율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저는 그럼에도 아내와의 연애담을 놓지 못하는 것입니다. 제 감정의 포즈는 좀처럼 부동자세로 돌아가질 않습니다. "테이프가 끊어지면 피가나오. 생채기도 머지 않아 완치될걸 믿소. 굿바이" 라니 그 머지 않아가 도대체 언제란 말입니까. 연애가 유쾌하기는 무엇이 유쾌하단 말입니까. 화자의 성장을 기뻐하는 마음과 지불해버린 순수한 연애를 슬퍼하는 마음이 겹쳐 공존하는 것이 이리도 괴롭다면 어찌해야한단 말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