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검난무/글

가검남사 히자마루

시라데유 2021. 2. 26. 08:39

최애 넨도가 가지고 싶어. 오늘도 그렇게 염불을 외웠지만 역시 무소식이다. 하다못해 스케일이나, 누스토같은 거라도 좋으니까...물론, 그것도 무소식이다. 그래서 대신, 최애의 1:1 스케일 피규어를 사기로 했다.

...본체의 이야기야?

하지만 이쪽도 쉽지 않다. 도검류는 통관에서 걸리기 쉽상인 것 같다. 받아주지 않는 배대지도 많단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원하는 매물이 없다. 절망했다. 결국 국내 샵을 뒤적거리다가 대신 히자마루의 가검을 주문했다. 히자마루도 좋아하고, 드림주의 초기도가 히자마루라는 설정이라 약간의 과몰입도 첨가되었다. 다행히도 국내업체라 문제없이 곧 받아볼 수 있었다. 너무 좋아! 물론 아쉬운 점도 있다. 겐지형제의 본체는 약간 각진 형태인데 이 가검은 그냥 둥글게 라운딩 처리 되어 있다는 거나 접착제가 깔끔하게 마감되어있지 않다거나, 하지만, 뭐 다른 것을 구할 여력도 없고 이걸로 만족하기로 했다.

옛날에 곁다리로 잠깐 죽도를 휘둘렀던 기억을 되새기며 가검을 뽑아보려고했다. 태도라 그런가 내 신장에는 좀 길어서 힘겨웠다. 몇번 휘둘러보고 인터넷으로 바르게 잡는 법도 찾아보고, 책장에 꽂혀있던 동아시아 무예도보통지를 펼쳐 따라도 해보고, 그렇게 가지고 놀다보니 어느새 잘시간이 지나있었다. 경대를 같이 주문하는걸 잊어서 둘 곳도 없고-벽에 세워두자니 쓰러질 것 같아-해서 자연스럽게 침대에 두게 되었다. 앗 이거 조금 두근두근한 걸. 내친김에 아예 끌어안고 자야지.



따뜻하다. 전기장판은 언제나 체온과 유사한 온도로 나를 따뜻하게 덥혀주었지만, 그것과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품이 꽉찬 느낌이다. 압박감마저 느껴지는 걸 보니 가위라도 눌린걸까?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리자 가장먼저 연녹색의 무언가가 눈앞에 있었다. 만져보니 머리카락 같은데, 더더욱 모르겠다. 더듬더듬 벗어둔 안경을 찾아 썼다.

"...히자마루?"

어디보자, 분명 내가 가검을 1:1 스케일 피규어라고 부르긴 했지. 하지만 이것도 덧붙이지 않았던가. 본체쪽의 이야기라고. 신나게 가지고 놀았던 내 가검은 어디가고 인간 쪽이 여기서 새근새근 자고 있는 걸까? 잠이 덜 깼나. 나는 상황을 이해하길 포기하고 눈을 감았다.

그로부터 몇시간, 핸드폰의 알림이 울리고 다시 눈을 떠도 내 품에는 여전히 히자마루가 안겨있었다. 아까와 다른 점은 눈을 뜨고 있다는 걸까? 느리게 눈을 깜박이던 히자마루는 나를 보고 베시시 웃고는 역으로 나를 껴안고 잠을 청하려고 했다. ...아?

"잠깐잠깐잠깐 어떻게 된거야?! 당신 누구야!"

새된 비명에 히자마루는 정신이 번쩍 들은 듯 일어나서 무릎꿇어 앉았다. 비명을 듣고 부모님이 방문을 벌컥열었다.

"왜, 왜? 뭐야?"
"아빠빠빠!!! 이거! 이거!!"

나는 경악해서 히자마루를 삿대질했다. 아빠는 고개를 갸웃하며 "어제 네가 산 검이 왜"하고 물었다. 아빠의 말에 고개를 돌리자 여전히 거기엔 코스프레 변태가 앉아있었다.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복장을 정돈하는 꼴을 보니 정신이 멍해지는 기분이다. "...검?" 아빠는 여전히 뭐가 문제냐는 듯한 표정이라 나는 아니, 꿈꿨나봐. 하고 변명할 수 밖에 없었다.

아빠가 방에서 나가자 코스프레 남은 "아마, 일반인에게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하고 말문을 열었다.

"겐지의 중보. 히자마루다. 여기 형님은 있나?"

없겠지만. 자문자답한 히자마루가 다시 침묵하자 어색해진 분위기를 이기지 못한 나는 히자마루를 따라 간단하게 이름을 밝혔다.

"딸, 출근해야지!"
"어? 어어어!"

밖에서 부르는 소리에 대답한 뒤 히자마루에게 여기 가만히 있으라 엄포를 놓고 급하게 출근준비를 시작했다. 대충 싰고, 옷장에서 옷을 꺼내 갈아입고-"고개 돌려!" "알겠다"- 가방을 둘러맨 뒤 일단 퇴근하고 이야기하자 말했다.

"심심하면 책이라도 읽던지!"

히자마루가 한글을 읽을 수 있나? 하는 의문이 점심시간쯤에야 들었지만 못 읽으면 뭐 어쩔수 없는 일이다. 애초에 내가 본 게 진짜인지도 모르겠다. 가검을 산 기쁨에다가, 아침에 잠이 덜깬게 겹쳐서 망상에 빠졌던건 아닐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현실은 이다지도 잔혹한 것이었다"
"주인. 무슨 일 있었나?"
"아니..."

가방을 바닥에 툭 떨구고 허망하게 중얼거리자 히자마루는 읽고 있던 책-몇 안되는 일어 원서였다. 역시 한글은 못 읽나본데-을 덮고 다가왔다.

"정체가 뭐야...?"
"아침에 이야기하지 않았나? 나는-..."
"아니 이상하잖아"

나는 히자마루의 손을 잡았다. 히자마루는 순순히 손을 내어준채 나를 보았다. 따뜻했다. 분명한 체온이 느껴졌다. 뭔가 왁스같은 걸로 세팅한게 아니라 자연스러운 머리스타일에, 특이한 머리색에, 짐승같은 노란 눈에, 단정한 정복을 입고, 허리에는, 내가 불평한 불만스러운 부분이 그대로인 가검이 있었다. 나는 피그말리온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어떻게 가검이 하룻밤새 인간의 몸을 얻은 걸까. 남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이상하다.

"어떻게 하면 좋지"

한숨을 푹 쉬었다. 히자마루는 신경쓰지말고 지금처럼 지내라고 말했다. "그저 주인을 곁에서 지키는 근시가 생겼을 뿐이다." 날도 없는 가검이면서 말은 잘하지. 급격한 피로감이 느껴졌다. 게임화면이라면 우측에 빨간표정이 떠있을 것 같다.



히자마루와 지내는 건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히자마루랑 대화하는 장면을 동생에게 걸렸을 때는 식겁했지만 동생눈에는 단순히 가검을 붙들고 혼잣말을 하는 음침한 오타쿠로 보이는 걸로 그쳤다. 히자마루는 남에게 보이지 않았지만 물리력은 행사할 수 있어 다과에 함께 어울려주거나 잘 때 껴안아주거나 이름을 말할 수 없는 검고 반들반들하고 까만 B를 처리해준다거나 해주었다.

히자마루의 등에 기대누워 폰검에 집중했다. 지금은 보스드롭률이 2배니까 지금 니혼고 스페어를 얻어두지 않으면. 한창 레벨링 중인 극 부대에서 히게키리가 호마레를 따 대사를 날렸다. 그러고보니 이 쪽의 히자마루는 아니쟈를 그렇게 찾지 않는 군. 힐끔 뒤를 훔쳐보면 히자마루는 내 히게 누이를 가지고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저런 걸 보면 형님 사랑이 어딜간 건 아닌데. 처음에 소개할 때도 당연하다는 듯 없을 거라고 덧붙였었다.

"히자는 히자가 갑자기 도검남사가 되어버린 것에 대해 아는 것이 있습니까아"
"히자마루다. 본인의 대한 일이니 어느정도는."
"그래?!"
"하지만 설명하긴 힘들다. 미안해."
"역시 사랑의 힘이라던가?"
"...그런 걸로 해두지. "
"아니, 해두지는 뭐야"

눈을 가늘게 뜨자 히자마루는 손으로 내 눈을 가려버렸다. "출진이나 계속해라. 형님이 기다리지 않나." 잘나셨어. 하고 툴툴대면서도 그 말에 따라 다시 폰검을 조작했다.



가검남사라고는 해도 히자마루 역시 근본은 어디 가지 않는지 칼을 다루는 데는 천재적이었다. 검도 배우고 싶다고 혼잣말을 하니 그럼 내가 알려주겠다 하며 히자마루의 레슨이 시작되었다. 스파르타식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의외로 느긋한 페이스였다. 히자마루 왈 "주인은 체력이 약하니까". 수련에 사용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그의 본체였다. 첫날 이후 오랜만에 만져본 것 같다.

"내 1:1 스케일 피규어..."
"피규어가 아니다."
"본체 피규어였는데 인간 쪽 피규어가 되어버렸어..."
"그러니까 주인, 피규어가 아니다."

전에 봤을 때보다 뭔가 깔끔해진 것 같은데, 삐져나온 접착제 자국이 없다. 이게 바로 가검남사 효과인가요?


-

언젠가... 생각나면 더 이어씀...